내 의도는 아니었지만,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내 마음의 단면을 CT촬영해본다면, 그 구멍의 크기는 어마어마하지 싶다. 큰 구멍을 채울 틈 없이, 일년 중에 제일 달갑지 않은 십일월을 맞았다. 날씨는 추워지고, 해는 짧아지고, 할 일은 줄지 않았다. 커다란 구멍에는 차가운 바람이 휭하고 들어왔다가 쌩하고 후비고 나간다. 무방비 상태로 찬 기운을 맞는다. 구멍을 파 낼 때가 힘들었지, 텅 빈 구멍에 찬바람을 맞는 일 쯤은 무덤덤하다. 차고, 시리지만, 죽을만큼 힘들지 않아서 이제 밥도 많이 먹고 잠도 더 잔다. 일주일 한번 저녁에는 춤을 추러 나가고, 친구를 만나고, 무거운 것 절대 들지 말고, 허리 꺾는 요가는 생각도 말라는 의사 선생님 말은 살포시 밀어두고 gimnasio도 가고 요가수련도 한다.

메세지가 왔다. 가섭이다. 비디오를 보냈다. 가섭이가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다. 구부정한 허리로,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온 마음으로 건반을 두드리고 있는 그 곡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7분여의 연주가 끝날 때까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났다. 가슴에 작은 살이 차올랐다.

부모님과 함께 와서 저녁을 먹고 갔던 아이가 토요일 점심에 가게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두 손에 소중히 들고 온 접시에는 아직도 따뜻한 오븐의 온기가 그대로 있는 치즈케잌이었다. 나를 주려고 구웠다고 했다. 혼자서 정신 없이 바쁜 와중이었지만, 서빙하던 그릇을 내려 놓고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 진짜 네가 구웠어?’ 하고 물으니 정말이라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음식을 만들고, 엄청나게 쌓인 설겆이가 끝나고 나서 내가 제일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나를 위한 음식을 만드는 일이기에 가게 일이 바쁠 때는 거의 먹지 않지만, 그 날은 치즈케잌을 크게 한조각 잘랐다. 아직도 케잌은 따뜻하고 폭신했다. 구멍 속이 따뜻하고 폭신해졌다.

미경이언니 전화다. 시계를 슬쩍 보니 한국은 새벽 두시였다. 새벽녘의 언니 목소리는 고혹적이다. ‘언니, 목소리 왜그래. 번짓수 잘못 찾았어. 나한테 왜이래.’ 내가 일이 끝나고 들어와 쉴 시간을 계산해서 잠을 안자고 전화를 한 모양이다. 늘 잠을 잘 자는 사람인데, 새벽 두시까지 기다렸다니 무슨일이야 하고 물어도 보고싶다고만 한다. 그 고혹적인 목소리로 대수롭지 않은 말만 하더니 이내 목이 잠겨서 참았던 말을 던진다. ‘민아야, 괜찮니? 너 괜찮아? 괜찮지?’ 얼마나 참았다 던졌는지 나는 느낀다. 언니는 계속 질척댄다. 사랑한다고, 자기가 있다고, 내가 어찌 되던, 무얼 하던, 딱 지키고 있다고. 아…. 질척대는 거 딱 질색인데…구멍 속이 질퍽해진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있다. 나를 가득 채웠던 커다란 것을 덜어내고 나니,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그 텅 빔이 두려웠는데, 이렇게 텅 빈 상태가 나쁘지 않다. 아무 것도 없기에, 조금만 닿아도 시렵기도 하지만, 조금만 닿아도 따뜻하기도 하다. 작은 것들의 세밀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나와 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던 것들, 사람들, 말, 세상이 아주 잔잔하게 그 구멍 사이를 드나든다. 따뜻하게, 폭신하게, 가볍게, 질척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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