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내가 외국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말한다. “부러워요” 그리고, 또 어쩌다 내가 타지에서 작은 식당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되면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대단해요”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저 영혼 없는 일관된 반응의 근거는 어디인지 의아하기만했다. 외국에 산다는 것, 바르셀로나 근교 아름다운 온천마을의 유일한 한국인으로 사는 그들의 표현대로 대단하고도 부러운 이야기, 내 기준에서 볼 때, 너무도 평범했던 오늘을 끄적여본다. 내게 가장 지루한 달은 십일월과 이월. 똑같이 춥고, 똑같이 흐리멍텅하다. (시작도 끝도 아닌 흐리멍텅한 것들)
흐릿한 구름이 낀 하늘 아래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빠르게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는다. gym으로 가는 길은 자전거로 5분이다. 그 5분 동안 크게 세번의 골목을 지나친다. 집 앞 횡당보도를 지나자 마자 있는 내르막길이 첫번째 여정이다. 차갑고 습한 바람에 목을 잔뜩 움추리며 자켓 지퍼를 코끝 바로 아래까지 바짝 치켜올리는 순간이다. 골목을 나와 큰길에서 나오는 차를 살피며 오른쪽으로 돌며 콩코스 강을 지난다. 하루는 물오리떼가 많이 나와있고, 하루는 물이 가물어 커다란 풀무데기만 보이는 날도 있다. 강수량을 확인하며 다리를 건너고 나면, gym으로 가는 마지막 한산한 대로이다. 오래된 카페에는 추우나 더우나 주민들이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Luis나 Jorge가 ‘올라 미나!’ 하고 인사를 하는 날이 대부분이다. 2년 째 계속되는 크고 작은 공사를 도와주는 이제는 친구이자 식구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나라를 여행하거나 한국에 갔을 때 가장 생각나는 것은 스페인의 과일이다. 스페인 태양으로 무르익은 제철 과일을 먹는 아침은 크나큰 기쁨이다. 사과, 배, 망고를 잘라 아침을 만들고 있는데, Luis가 발코니 덧창을 떼어 나르기 시작한다. 3층에서 1층까지 두 서너번 오가고 마지막 숨을 고르는 Luis에게 묻는다. ” 나 아침 먹는데, 너도 먹을래?” 그렇게 우리는 테라스에 앉았다. 루이스가 얼마전 손을 본 발코니 펜스 시멘트를 잘 발랐네, 못발랐네로 시작해서, 루이스가 맡은 큰 공사에서 돈을 못받은 이야기, 크고 작은 공사 이야기, 그리고 처음으로 우리집에 왔을 때 이야기가 이어진다. 햇살이 따뜻하게 등을 지지고, 루이스 말은 반은 알아듣고 반은 못 알아듣지만 서로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아침을 먹고 볼일을 보러 간다. 아마존 물건을 반품하고, 수리를 맡겨놓은 자전거를 찾고, 도배풀을 사고, 컴퓨터 점에 들렀다가, 옷 수선집에 옷을 맡기고 집으로 오는 여정이다. 1층 charisse가 문자가 왔다. “점심 먹고, 정원에서 차 마실껀데, 시간되면 나와!” 내가 답장을 했다. “그럼 아예 점심을 정원에서 먹자!” 그렇게 해서 다시 정원에 점심 피크닉 상이 펼쳐졌다. charisse 커플을 밥과 치킨을 갖고 나왔고, 나는 엊그제 먹고 남은 커리와 샐러드, 집에 오면서 주섬주섬 사온 먹을거리를 들고 나왔다. 루이스가 밖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아침에 이어 점심상에도 초대되었다. 시험때라 학교에 가지 않았던 서진이는 뒤늦게 일어나 샤워를 끝내고 수건으로 머리상투를 틀고 첫끼 밥상에 앉았다. 아… 햇살이 따뜻하다. 마침 검정색 케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있었으므로 등짝을 지지기에 더 없이 좋았다. Uri가 좋아하는 개구리를 보러 몬세니 산을 다녀왔다는 charisse 부부의 이야기, 루이스의 공사모험담, 우리집 처음의 참담했던 상태와 아직도 루이스가 믿어 의심치 않는 비밀의 방과, 비밀의 통로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어떤 이야기도 상관없다. 배는 부르고 등은 따뜻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끝없이 계속되고 나는 살짝 그 세계를 떠나 작고 따뜻한 내 안으로 들어간다. 소리는 잡음이되고 내 안의 감각이 살아나는 순간이다. 그저 이월의 햇살에 온전히 감각을 내 맡긴다.
매일이 전쟁같았다. 가게를 시작하고 꾸려간다는 것. 오래된 버려진 폐가를 고쳐나가는 일. 이 것을 멋있고 대단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의 진정성을 믿은 적도 없었지만, 이것은 멋있고 대단한 것과 거리가 상당히 먼 일이었다. 고단했고, 혼자였고, 싸워야했고, 당해야했다. 항의해야했고, 포기해야했다. 잊어야했고, 묻어야했다. 돌봐야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지만, 바로 그것만 돌보지 못했다. 나만 빼고 돌보는 일에 혼신을 다 했다. 나의 일, 나의 고객, 나의 가족, 나의 사람, 나의 집. 분명 그것들은 내가 아니었지만, 그것들을 돌보는 것이 나를 돌보는 것이라고 믿었던 어리석은 날들을 다 보내고 나서 다행히도 배움이 있었음에 위로를 한다. 그 배움은 바로 용쓰지 않는 거였다. 5월말이면 완공이 된다는 수영장 공사는 8월 말이 되어 끝나서 수많은 에어비엔비 손님을 날리고, 보상해주고, 욕을 들어먹었지만, 결국은 그 공사를 맡았던 루이스와 친구가 되서 아침도 먹고 점심도 먹는 일이다. 까막눈으로 대출을 받고, 세무조사를 받고, 불복신청을 하고, 세무사를 바꾸고, 결정을 받는 그 모든 지난했던 과정에서 덤으로 씁쓸한 인간의 원초적 이기심과 인간성의 밑바닥과 대면해야하는 씁쓸한 경험까지 덤으로 맛보아야하는 일이다. 이 고단하고 자신을 볶아대는 일들은 결코 대단하지 않고 결코 멋지지 않음은 확실하지만, 그 대신 알아 낸 대단하고 멋진 일이 있으니 그것으로 나는 행복하다.
햇살에 등을 지지고 내 안으로 잠수를 타는 일이다. 순간 세상의 잡음은 얼음이 된다. 내 안의 불꽃만 내 등에 내리쬐는 태양만큼 따뜻하게 느끼는 것이다. 꺼지지 않은 그 따뜻한 주황빛 불꽃을 만나는 순간이 나의 특별한 하루의 순간이다. 그것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나만이 알아차리는 아주 대단하고 멋진일이다.